장원 교수님이 링크해 주신 굽본좌의 만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6086481?fbclid=IwAR0Kp4_56ZPbEB1gjcKuwK89L_2VmbcoA6jSdMsSiGYR42HC4F5Gos9cPrM

이 만화 내용 전부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동의할 수 밖에 없는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구냉전의 잔해 속에 숨어 신냉전의 열외를 꾀한다'

중국의 개방 이후, 지난 한 세대 정도의 시간 동안 한국이 취해 온 모드는 거칠게 말하면 이렇다. 안보는 미국의 우산 하에 국방력을 미친듯이 키우고, 경제는 중국과의 무역 속에 흑자를 미친듯이 키운다는 모드.

한국은 6.25 이후,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지속하면서도, 북한의 주기적인 도발을 핑계로 자주 국방에 어쨌든 돈을 계속 쏟아 부었고, 2010년대 들어 조금씩 사거리 제한이 풀리는 발사체 기술을 급격히 확보할 수 있었다. 2020년대 들어 한국의 국방력 투사 대상이 휴전선 이북 수 백 km 정도의 좁은 강토에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 주변 국가들은 이제는 아무도 없다. 한국은 북한을 제어해야 한다는 핑계로 미사일 발사체의 사거리를 조금씩 늘려 왔고, 마침내 작년에는 40여년간 족쇄로 작용하던 한-미 미사일 지침이 완전히 폐기되어, 이제 한국은 이론적으로라면 ICBM도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현무급 미사일의 경우, 탄두 중량에 따라 사거리가 달라지지만 대략 0.5-2톤 정도의 탄두를 탑재하여 짧게는 200-300 km, 멀리는 1500-2000 km까지도 (비공식적으로는 3000 km 이라는 이야기도..) 날려 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사일 뿐만 아니라, 5세대 스텔스 전투기 F-35 같은 경우 60기까지 운용 예정이고, 4.5세대 국산 스텔스기도 수년 안에 양산되기 시작할 걸이며, 아마도 4-5만톤급 경항모도 2030년대쯤 되면 운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안보의 비용을 점차 방어 위주에서, 주변국에 대한 보복 타격 능력 강화 쪽으로 선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미국의 묵인 하에 기술 개발이 진행된 덕도 있지만, 한국이 그 정도의 비용을 감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1세계 선진국 중에서도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이 높은 축에 속한다. 1위 이스라엘 (5%대), 그리고 미국 (3%대)을 제외하면 거의 3%에 근접하는 유일한 나라다. 높은 비중의 GDP 대비 국방비는 물론 감가상각 비용과 매몰 비용이 큰 투자이기도 하므로 국가 경제 상으로는 사실 별로 좋은 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국방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자체는 한국의 경제적 체급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실력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제가 IMF 이후 비약적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70-80년대 겨우겨우 만들어 놓은 제조 입국으로서의 기본 체질을 온존하면서도, 체질 개선을 통해 지식산업으로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제조업과 지식 산업을 통해 만들어 낸 고부가가치 제품의 수출 시장이 때마침 크게 확장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90년대말-2000년대초 사이의 한국은 자체적인 역량과 시대의 운발이 동조된 호기를 맞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은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을 외치며 2000년대 들어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성장 모드에 돌입하면서 거대한 생산기지이자 소비 시장으로 변모해 왔다. 지근 거리에 위치한 공업 입국인 한국 입장에서는 갑자기 엄청나게 큰 수출 시장이 열린 셈이었다. 실제로 한국의 대중 수출액은 2003년을 기점으로 대 타이완 수출액을 추월했다. 물론 그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최근 들어 연간 대중 수출액은 대략 130-160조 사이인 반면, 대 타이완 수출액은 연간 20-30조 사이에 불과할 정도다. 특히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큰 돈을 벌어들이는 주요 고부가가치 제품은 반도체이며, 연간 수출액은 대략 40-50조 정도 된다. 중국은 반도체 기술굴기 기조 하에 끊임 없이 자국산 반도체 자급률 제고를 외치고는 있지만, 전 세계 IT 생산 기지이자, 자체적으로 큰 IT 시장인 중국에서 반도체 자급률 50%는 커녕, 20% 달성도 당분간 요원한 상황이다. 이는 여전히 존재하는 기술 격차와 더불어 생산 캐파의 현실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국의 외국 반도체 의존도의 상당 부분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서 비롯된 것이고 (중국의 반도체 산업 대회 의존도가 가장 큰 나라는 대만), 실제로 하이닉스 같은 회사들에게는 중국이 가장 큰 시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안보와 경제적 실익의 사이에서 불리하기만 해 보였던 지정학적 특수성을 오히려 역으로 잘 이용하여 아슬아슬하게 국력을 키워 온 한국은, 이제 점점 그 특수성에 마냥 나라의 운명을 맡기기 어려워지는 시점을 맞고 있다. 그 시점이 언젠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다들 예상해 왔지만,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 될 전망이다. 미-중 사이의 무역, 기술 갈등이 2010년대 들어 본격화되고, 트럼프 정권을 거쳐 바이든 정권에 와서도 그 갈등이 진화되기는 커녕 점점 경제적 갈등 그 이상의 단계로 확전되고 있는 양상 속에, 이제 미국은 다양한 경로와 장치를 통해 대중 포위망을 강화시키고 있다. 당연히 미국의 구상 속에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체급이 꽤 커져 버린 최전방 동맹국인 한국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유사 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병참기지, 나아가 전투병을 파견하여 같이 피를 흘리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한국에 전개해 놓은 전략 자산을 빌미 삼아, 대북 정보 공유를 조건 삼아, 한국은 그러한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상태가 될 것인데, 하필 한국이 투사하는 무력의 창끝이 결국 중국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할 부분을 향하게 될 것이라는 부분이 문제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 북한 핑계를 대며 국방력을 크게 강화시켜 왔지만 막상 그 국방력의 투사 대상이 되는 북한은 이제 핵을 제외하면 존재감이 거의 없어졌고, 누구나 추측하듯, 한국의 최신 전력은 beyond NK 라는 것이 확연해진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의 요구에 마냥 밍기적거리고 있기도 힘들다. 대북 견제를 빌미로 구냉전의 상황에서 존재감을 감추며 중진국 코스프레 하기는 이제 불가능해졌다. 대학생이 애써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으면 대충 중고등학생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30대 중후반 아저씨가 계속 교복을 입고 학생 코스프레하면 우스워진다. 중국과의 무역을 핑계로 신냉전의 열외를 꾀하는 것 역시 이제는 어려워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공급망의 질서에서 열외되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는 가장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중이 서로 겁만 주고 견제만 잔뜩하는 현재의 기조가 어쨌든 위태롭게나마 유지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서든 지금까지 해 왔던 줄타기를 간신히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올해 2월 들어 상황은 급격히 그리고 많이 바뀌고 있다.

중국만큼의 세계적 비중은 없지만, 여전히 핵강국이자 전통적인 글로벌 강국으로서 그 존재감을 감출 수 없는 러시아는 마침내 독재자 푸틴의 오판 속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전쟁을 시작했고, 그 전쟁은 언제든 우크라이나 주변의 나토권으로 확전될 수 있다. 실제로 다음 차례는 발트 3국이 된다는 전망이 있으며,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비 NATO 회원국들이 NATO 가입시도 시 확전될 것이라는 러시아의 위협이 살벌하게 나오고 있다.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심각하게도, 러시아의 미친 독재자는 급기야 핵무기 사용을 언급하기에 이르렀고, 그 미친 독재자가 설마 미친 짓을 할리 없다는 전문가들의 추측은 이제 점점 그 근거가 약해지고 있다. 독재정권과 강대국이 조합되었을 때, 그 어떤 전문가들의 예측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소련 붕괴 후 겨우겨우 유지해 오던 국제 질서가 하루 아침에 전쟁 모드로 돌입할 수 있음이 현실로 다가 왔고,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외치던 '동맹'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이제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 무게가 중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한국은 그간 외면해 온, 그리고 스스로 열외라고 최면을 걸어 온 청구서를 미국과 중국 양국으로부터 받기 시작할 것이다. 영원히 큰 폭의 흑자를 꼬박꼬박 안겨줄 것만 같던 중국의 반도체 시장은 언제든 한국산 반도체 수입을 금하고 중국 내 한국 회사들의 자산과 기술을, 엔지니어들을 압류하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 병참 지원 정도만 하면 될 것이라 안심하고 있다가, 중국이 대만해협에서 군사적 이벤트를 벌이게 되면 한국의 수 많은 젊은이들이 경항모와 F-35, 수십 척의 군함을 타고 전장에 동원되어야 하는 상황, 자칫하다가는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북한의 오판을 막기 위해 휴전선에 대기 중인 육군 7군단은 급작스러운 북한 사정의 변동 속에, 평양 부근에서 압록강을 도하 해 온 동북 지방 중국의 집단군과 대치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수십 년 간 애써 모른 체 해 온 청구서와 숙제들이지만, 이제 그것들이 가산금과 벌칙이 부과된 독촉장으로 화할 날이 드디어 도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크라이나가 힘 없이 러시아 같은 강대국에게 국토를 유린 당하는 일이 언제든 한반도에서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해 온 것 같은 국방력에 대한 투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력의 보존과 성장률의 제고를 꾀해야겠지만, 이제는 안보와 경제를 각각 다른 파트너와, 그것도 서로 적대하는 파트너와 평형을 이루며 계속 끌고 갈 수 있으리라 믿는 나이브함은 재검토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군사적으로 선제 타격, 경제적으로 선제 대응을 하는 신중치 못 한 과민 반응은 없어야겠지만, 상황이 만들어지고 액션을 취해야 할 시점이 오면 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함은 마땅하다. 실기는 군사 작전뿐만 아니라, 국제 정치 관계에서도 크나큰 패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누가 되더라도 다른 것은 잠깐 뒤로 밀어두고서라도, 청와대 집무실 책상에 앉는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인수위 오피스에서부터 당장 시시각각 급변하고 있는 세계 정세를 투명하고 냉철하게 보는 것부터 국정 과제를 시작하기 바란다. 제대로 혜안을 갖춘 사람을 정파에 상관 없이 등용하고,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한국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기관을 중용해야 한다. 차기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적 포텐셜에 대한 공부를 더 깊게 하고 한국이 걸쳐 있는 산업 구도와 국제 질서 사이의 네트워크 구조를 더 깊게 공부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차세대 기술 표준에 한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부 이니셔티브를 확장해야 하고,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내야 할 비용은 제때 내고, 참여해야 할 조치에는 제때 참여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추길 바란다. 한국은 이제 과거처럼 북한을 핑계로 열외로 인정 받기도 어렵고, 중진국으로서 깍두기 취급 당할 나라도 아니다. K-문화 선진국, 눈떠보니 선진국 외치기 전에, 그 급에 걸맞는, 그 클래스에 걸맞는 전략과 브레인이 갖춰져야 한다. 존재감을 나타내고 싶으면 그에 맞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불행히도 아마도 이제는 외줄타기는 어려워질 것이고 어느 한 편에 서기 시작하면 다른 한 쪽과의 갈등은 깊어지겠지만, 그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극단적인 다리 불사르기는 자제할 수 있는 참을성도 갖추길 바란다. 시대의 변화가 우리의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그리고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게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권석준 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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