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한면 전체를 점령해가며 검찰과 사법부를 터무니없이 비방하는 대깨조 글을 쓴 이진경에 대한 비판이 오늘 하루종일 많았었다. 그런데 어떤 분께서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금을 살고 있는게 아니라 자기 시대(주로 본인들의 20대라는 뜻)를 사는 것 같다."는 평을 하셨다. 본인들의 젊은시절에 한번 형성된 세계관은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고 객관적인 정세가 변화해도 웬만해서는 안 바뀐다는 뜻이다.

20대에 겪은 정치적, 경제적, 국제적 사건들과 거대한 시대정신의 흐름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물론 나이가 먹어도 머릿속을 헬창하듯 단련해서 세계관을 적절히 수정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범부들은 물론이고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지식인들과 정책결정권을 가진 관료들, 정치가들, 기업가들도 대부분 그 일에 실패한다.

요즘 느끼는건 이진경 같은 586세대(와 그 가방모찌들인 X세대)가 갖는 집단적 무지성도 그렇지만 80년대생들이 갖는 다소 나이브해 보이는 자유주의적 낙관론도 웬만해선 스스로 고치기가 힘들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친문자유주의자들이건 국힘자유주의자들이건 80년대생의 낙관론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세계가 자유민주주의 정치원리와 경제적 상호의존으로 인한 글로벌화, 상업의 확대와 함께가는 국제 영구평화와 소수자인권의 확산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당장 3~5살만 많은 형님들이랑만 얘기해봐도 이분들이 경험한 세계사와 내가 경험한 세계사가 의외로 상당히 다르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참고로 나는 89년생.)

하기야 80년대생들은 빠르면 2000년대 초반에 20대를 시작했고, 2010년대 초중반까지 그들 세계관의 형성을 다 끝마쳤으니,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명제이자 시대정신이자 현실로서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머리가 굳기 전에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충격파를 겪었고, 자유주의적 낙관론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당위로서 좋은 말일 순 있어도 현실을 설명하기는 더 이상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 후로 급격히 정립하기 시작했다. 브렉싯 찬성 가결투표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라는 두 큰 사건이 있었던 2016년에 나는 한국나이로 스물여덟이었다.

2016년은 세계사가 한 시대를 끝내고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오만함은 이미 그전부터도 자유주의를 망하게 만들 징후들을 만들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확산시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라크전을 일으킨 네오콘의 민주평화론은 명예가 실추됐다. 1970년대부터 진행된 제조업의 오프쇼어링은 선진국의 노동자들을 희생시킨 대가 속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값싼 제품을 마구 공급하며 선진국의 소비자들에게 양적 소비를 권장하면 사람들은 아무 불만도 안가질줄 알았다. 기업들은 돈을 벌수만 있다면 권위주의 국가나 심지어는 미래에 서양의 패권질서 자체를 위협할 가능성도 있는 중국 같은 국가로 우르르 몰려갔다.

우파는 기업들의 이러한 상업우선주의에 만족했다. 그런가하면 좌파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정치가 무너진 뒤 여성, 소수자, 환경 의제 등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또한 사회의 전반적인 고학력화가 진행되면서 좌파의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고학력.고소득층으로 대체되어 갔다. 토마 피케티는 이 두 집단을 "브라만 좌파, 상인 우파"로 일컬었고 1990년대 이후 서양의 정치경제는 이들의 경쟁 내지 적대적 공생으로 이끌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때마침 브라만 좌파들이 밀었던 의제들은 미국의 대기업들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고, 그렇게 인텔리 좌파와 재계가 정치적으로 동침하는 일은 잦아졌다. 브렉싯 역시 브라만 좌파와 온건 좌파, 중도파에다 영국 기업계, 친기업 우파, 온건 우파가 단합하여 반대했다. (브렉싯 찬성측에서도 물론 반세계화 좌우합작이 이뤄졌고 이들이 결국 이겼다.)

브라만 좌파, 상인 우파, 대기업 모두가 '지정학의 귀환'을 너무 우습게 생각했다. 이들이 19세기의 케케묵은 유물이라며 무시했던 지정학과 그 실행주체로서의 근대 국민국가는 21세기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이제 민주주의 확산이나 상업적 상호의존의 이해관계는 고전적인 의미의 "국익" 앞에서 꿇어야 한다. (아울러 그동안 1990년대 이후의 미국 절대패권과 글로벌 상업을 통한 다문화주의에 역설적으로 기대고 편승하여 담론을 펼쳐왔던 탈식민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도 퇴조할 것이다.)

상아탑 좌파, 상인 우파 다 비켜라. 무관귀족 현실주의자가 납셨다. 이제 각국의 대외정책은 세력균형과 위협균형의 원리에 의거하여 정해진다. 우리나라의 첨단기술은 상대국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해도 절대 팔아넘길 수 없으며, 당장 장사 좀 못한다고 해서 상대와 제3국에게 약하게 보일 수 있는 양보는 절대 할 수 없다. 양보라는 건 내가 여유있다는 티를 낼 수 있을때만 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와 기업을 경영하는 원리도 일상적인 행정처리나 매일매일의 금융적 관점만으로는 더 이상 안 통하며, 장기적인 전략적 이익을 위해 단기적인 손실도 감수할 용의가 있는 지도자적 관점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상업적 이해가 지정학의 무거움을 언제까지고 이길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관점은 좀 재고해야 한다.

90년대생들과 00년대생들은 이러한 시대 변화상에 이미 잘 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정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정치 차원에서도 사회 각 세력의 이해관계를 분석하는 관점에 이전 세대보다 훨씬 익숙해져 있다. 이전 세대들은 이념과 당위라는 분석틀에만 비교적 익숙해 있었다.

김진우 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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