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키신저의 세계질서』 ① - 현대적 외교의 출발, ‘베스트팔렌 체제’의 탄생과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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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2월 25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예전에 사서 읽다 말았던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민음사, 이현주 옮김, 최형익 감수)를 꺼내서 이번에 완독했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헨리 키신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감탄하면서 봤다.

헨리 키신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크게 ‘4개의 질서’로 본다. ①유럽 질서 ②이슬람 질서 ③아시아 질서 ④미국 질서다.

책의 목차는 총 9장이다. 4개의 세계 질서를 각 2장씩 분량으로 다룬다.(1~8장) 마지막 9장은 현대적 특색을 다룬다. 9장은 핵 개발 이후의 세계질서와 사이버 공간의 대두가 안보에 주는 의미를 담는다.

4개 문명의 역사서이기도 하고, 4개의 지정학, 4개의 외교론, 4개의 국제정치학을 종합한 책이다.

매우 재밌고, 유익하게 봤다. 가급적이면 3~4회에 걸쳐 내용 전부를 요약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이번 글은 <유럽의 세계질서>에 관해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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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의미의 외교 이론은 유럽에서 발생했다. 헨리 키신저는 유럽식 질서의 기원을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서 찾는다. 베스트팔렌 체제다. 베스트팔렌은 당시 평화조약에 체결되었던 독일의 지방 이름이다.

나머지 세계 질서와 구분되는, 유럽식 세계 질서의 가장 큰 특징은 <다원주의>다. 다원성, 다원주의 역시 베스트팔렌 체제를 기원으로 한다.

구교(가톨릭) 세력과 신교(프로테스탄트) 세력은 30년 전쟁(1618~1648)을 치룬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영국, 프랑스, 스페인 세력들이 30년 전쟁에 관여됐다. 당시 유럽 세력 대부분이 관련됐다.

평화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가톨릭 세력을 대표한 참가자는 178명이었고, 신교 세력을 대표한 참가자는 235명이었다.(p.35~36) ‘30년 전쟁’에 얼마나 많은 세력이 결부되어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3개의 조약>을 통칭해서 표현한 것이다. 3개의 조약이란 1648년 1월에 체결된 뮌스턴 평화조약, 1648년 10월에 체결된 뮌스터 조약과 오스나브뤼크 조약이다.

이 중에서 1648년 1월에 체결된 뮌스턴 평화조약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30년 전쟁은 동시에 ‘네덜란드 독립전쟁’이기도 했다.

30년 전쟁의 특징 중 하나는 처음에는 보편적 원리와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웠으나, 전쟁 중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관계자가 ‘본래의’ 동맹국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30년 전쟁을 통해, 유럽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훗날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 경의 표현대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만이 영원할 뿐이며, 그 이익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처절하게 배우는 시기였다. (p.39)

이들이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상대방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게 된 것은 상대방을 물리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든 관계자는 전쟁 중에 한번씩은 ‘본래의’ 동맹국에 버림받았다. (..) 역설적으로 참가자들은 이러한 일반적인 병폐와 냉소주의 덕에 <특정 전쟁을 끝내는 현실적인 수단>을 세계 질서의 일반적인 개념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 갖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국내 체계를 갖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주권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p.37)

한때 홍세화 선생님을 통해 유명해진 개념 중에 ‘똘레랑스’가 있다. 관용의 프랑스 표현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똘레랑스 개념이 정착하게 된 것 역시 종교전쟁과 관련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죽고 죽이는 짓을 하다가,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하고 지치고 지쳐서 서로 ‘관용’을 베풀기로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표현의 자유 & 사상의 자유>의 기원 역시 유럽의 종교전쟁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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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p.38)

► 첫째, 제국이나 왕조의 종파가 아니라 <국가>를 유럽 질서의 기본 요소로 확인했다.

► 둘째, 각국은 <국내체제와 종교적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됐다. 구교/신교의 강제를 받지 않는 국가 단위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과 <국가>를 유럽 질서의 기본 요소로 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다.

► 셋째, 우방국 수도에 상주 대표를 주둔하게 됐다. 관계를 조절하고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대사관’의 기원이다.

► 넷째, 충돌로 이어지기 전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미래의 회의와 회담>을 하게 됐다.

► 다섯째, 30년 전쟁 전에 유럽 여러국가를 돌아다니며 조언을 했던 그로티우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발전시킨 <국제법>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확대 가능한 <합의 원칙>으로 취급하게 됐다.

► 여섯째, <내용>에 관한 합의가 아니라 <절차>에 관한 합의다.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교황의 권한은 교회 기능으로 국한됐다. <주권 평등의 원칙>이 지배하게 됐다.

정치학에서 ‘국가의 탄생’을 설명하는 대표 이론은 크게 3개가 있다. 존 로크, 토머스 홉스, 장 자크 루소다.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이 출간된 해는 1651년이다. 『리바이어던』이 하필 1651년에 출간된 이후는 바로 이 시점이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년)으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리바이어던』은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자연상태는 권력의 부재로 인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국가에 넘기면 국가는 사람들에게 ‘안전’을 제공해준다. 『리바이어던』은 <주권 국가의 권력 독점>을 설명해준다.

홉스가 가정하는 ‘자연상태’는 ‘30년 전쟁’에 대한 비유적 묘사로 볼 수 있다. 홉스의 국가론 자체가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참고로, 존 로크(1632~1704)의 국가론은 ‘사회계약’에 기반한다. 사회계약론은 존 로크가 저술한 『통치론』에 유래한다. 『통치론』이 출간된 해는 1689년이다.

1688년은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있던 해다. 명예혁명은 왕과 귀족의 타협체제를 의미하며, 영국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안착하는 분기점이다. 즉, 존 로크의 『통치론』(1689년)은 명예혁명(1688년)이 있고 1년 이후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해준 책이다.

새롭게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식 3권분립의 유래인 몽테스키외(1689~1755)의 『법의 정신』이다. 『법의 정신』이 출간된 시점은 1748년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국제 체제’에 적용되던 원리였다.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론은 이를 ‘국내 정치체제’에 확대 적용한 정치 이론이다. 결국,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론 역시 <베스트팔렌 체제>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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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체제가 실효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세력 균형>이 작동해야 한다. 헨리 키신저는 책 전체를 통해 ①정당성 ②힘이라는 두가지 개념을 통해 서술한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이 중에서 ‘정당성’을 담당한다. ‘힘’이 있어야 실제로 작동된다.

‘힘’의 관점에서, 이후 유럽에는 두 가지 세력균형이 작동하게 된다. 하나는 영국이다. 영국은 유럽 전부를 아우르는 <전체적 균형자> 역할을 한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중부 유럽>의 균형을 위해,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는 <독일 통일>을 막는 역할을 한다.

즉, 영국은 유럽 전체의 세력균형을, 프랑스는 중부 유럽의 세력균형을 담당한다. <이중의 세력균형> 구조가 작동했다. 영국은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을 위해 특정 국가와 ‘동맹관계’를 맺는 것도 하지 않았다.

세력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약한 쪽에 힘을 보태서, 힘의 균형>을 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시기에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프랑스에 맞서 싸운다. 러시아가 오스만투르크에서 크림 반도를 빼앗은 이후에 벌어진 크림전쟁(1853~1856년)에서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러시아에 맞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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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 <세력 균형>이 크게 흔들리는 시점은 2번이다. 첫째,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1797~1815년) 시기다. 둘째, 독일 통일 이후,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다.

먼저,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난다. 1792년 11월, 프랑스 국민 공회는 두 개의 법령을 발표한다.

► 첫째, <인민 혁명>이 발생한다면 (외국을 포함) 어디든 프랑스군이 전면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 둘째, 자유와 평등을 거부하거나 포기하면서 군주와 특권계급을 보호할 경우 적으로 취급할 것을 선언한다.

프랑스 국민 공회는 “자유를 되찾으려는 모든 국민들에게 우애와 원조를 보낼 것”을 약속한다. 국민 공회는 프랑스 왕을 단두대에 처형한다. 이후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네덜란드 침략을 감행한다.

헨리 키신저는 프랑스 혁명과 국민공회의 법령 선포를 <베스트팔렌 체제>에서 보장하고 있는 <다양성>에 근거한 <주권 평등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허무는 것으로 해석한다.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그렇게 엄청나고 보편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내에 반대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노력했다. 공포 정치는 수천명에 달하는 과거 지배계층과 모든 미심쩍은 국내 반대 세력을 살해했다. (..) 2세기 뒤에 이와 비슷한 동기가 1930년대 러시아 대숙청과 1960년대, 197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기저를 이루었다.” (p.57)

프랑스 대혁명의 세계관은 세계를 절대선(絕對善)과 절대악絕對惡)의 대결 구도로 보는 것이다. 마치 봉건주의 시대 신학적 세계관이 그랬던 것처럼, ‘옳고 그름’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기반한다.

프랑스 국민공회의 무질서는 나폴레옹에 의해 정리된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점령하는 나폴레옹 전쟁(1797~1815년)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유럽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다.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쳐들어갔지만 (훗날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의 혹독한 동장군(冬將軍)을 만나 결국 패배하게 된다.

러시아는 유럽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기도 하는 존재다. 당시 유럽인의 관점에서 본 러시아는 “유럽의 심장에 대초원의 활력을 안겨주는 혼혈아같은 존재이다”(p.63)

헨리 키신저는 역사를 통해 보여지는 러시아의 특징 중 하나를 ‘팽창 욕구’로 본다.

“러시아 황제는 중국의 황제처럼 전통에 비해 신비로운 힘을 부여받아 대륙 전체에 펼쳐진 광활한 영토를 두루 살피는 절대 통치자였다. 그러나 차르의 지위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중국의 황제와 달랐다.

중국의 관점에서 황제는 <평온한 행동>을 통해 어디든 지배할 수 있었다. 반면 러시아의 관점에서 차르의 지도력은 도전할 수 없는 권력을 주장하여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고 모든 구경꾼들에게 <러시아라는 국가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능력을 통해 효과를 발휘했다.

(..) 따라서 중국 황제들이 <공정하고 냉정한 자비>로 칭찬을 받았던 반면, 19세기의 역사가 니콜라이 카람진은 러시아의 차르는 <무자비한 태도>에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p.70)

『헨리 키신저의 세계질서』는 미국에서 2014년에 출간된 책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푸틴이 하고 있는 짓꺼리는 헨리 키신저가 언급한 ‘러시아 황제, 차르’의 특징과 완전히 일치한다.

광대한 영토, 그러나 풍요롭지 못한 지리, 열등감과 콤플렉스, 확장주의, 주변 지역에 대해 강압적 힘을 통한 권위의 획득이 모두 그렇다. 차르, 스탈린, 푸틴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 제국 리더십의 (지랄같은) 특징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만들어진 체제가 <빈 체제>이다. 1815년이다. 빈 체제의 중심 국가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였다.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를 위협한 두 번째 사건은 독일 통일 이후, 양차 세계대전이다. 1차 세계대전은 1914~1918년 기간동안 벌어졌다.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협약이 ‘베르사유 조약’이다. 1919년에 체결된다.

미국 월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조선 민족의 3.1 만세운동은 모두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배경으로 벌어졌던 사건들이다.  

유럽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에게 가혹한 배상금과 제재를 가한다. 이후 히틀러가 재무장을 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개입을 통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질서의 가장 큰 특징은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등장>이다.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1947년 그리스-터키 사건을 계기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미국은 1947년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원조계획을 발표하고, 1948년에는 마셜 플랜을 발표한다. 194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을 통해 미국-유럽의 동맹관계를 수립한다. (오늘날 나토의 출범이다.)

미국과 유럽의 북대서양 동맹은 <베스트팔렌 체제>와 상이한 방식을 갖는다. 헨리 키신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과거와 달리) 그러나 본질적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은 유럽 내부의 협의로부터 미국의 핵능력을 이용한 소련에 대한 전세계적인 봉쇄로 전환했다.

(..) 미국은 균형을 지키기 위해 조화롭게 행동하는 여러 국가들간의 관계가 아니라 미국이 <합작회사의 사장 역할>을 하는 관계로 동맹관계를 이해했다.

유럽의 전통적인 세력 균형은 <각 회원국의 평등함>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 그러나 대서양 동맹은 공통된 체계에 동맹국들의 군사력을 합치기는 했지만, 주로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력, 특히 핵 억제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 유럽은 핵우산을 제공받는 대신 미국의 우월적인 지위를 인정했다. 유럽 국가들은 추가적인 병력을 창설하는게 아니라 동맹국의 결정에 발언권을 갖기 위해 각자 군사력을 키웠다. 말하자면 미국의 억제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입장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p.106~10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나토 체제와 베스트팔렌 체제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유럽은 베스트팔렌 체제를 폐기한 것인가? 이에 대해 헨리 키신저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새로이 등장한 체제는 베스트팔ㄹ네 체제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 베스트팔렌 국제 체계로 유럽이 돌아갔음을 알리는 존재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국가>가 아니라 <지역의 세력>으로서, 글로벌해진 베스트팔렌 체제의 <새로운 단위>로서 유럽연합을 이해할 수 있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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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Cold War) 개념은 열전(Hot War)의 반대 개념으로 탄생했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반면, 아시아는 상황이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열전’의 시대를 보냈다.

2022년 2월 25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처음으로 ‘열전’이 전개된 상황에 해당한다. 한편으로는 <신냉전>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차갑지’ 않다는 의미에서 <냉전의 종료>로 해석할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은 헨리 키신저가 지적했듯,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을 축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는 과거에 비해 쇠퇴했다. 그런데 실은 러시아 역시 과거 소련 제국에 비해 (미국보다) 쇠퇴했다.

2020년 기준 러시아의 GDP는 1.5조 달러다. 순위는 11위다. 미국의 GDP는 21조 달러다.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의 GDP 합계는 13.9조 달러다. 러시아의 GDP 규모는 캐나다와 한국의 1.6조 달러보다 살짝 적다.

군사력 역시 궁극적으로는 경제력과 연동된다. 러시아는 ‘핵 강국’이지만, 러시아의 경제력은 인도, 이탈리아, 한국, 캐나다에도 미치지 못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체제>는 다양성의 존중과 주권 국가의 평등함을 전제로 작동한다. 유럽의 역사에서 베스트팔렌 체제는 총 3번 위협당했다. ①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 ②독일 통일 이후 제1차 세계대전, ③히틀러의 등장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글로벌 단위의 베스트팔렌 체제>를 위협하는 유럽에서 발생한 4번째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이 유럽 집단안보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헤게모니 쇠퇴 이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의 단결과 유럽 차원의 재무장>을 강화하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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