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론에 대해 (2) - 왜 진보정치는 청년남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나>
지난번 남초 커뮤니티에서 유행한 설거지론에 대한 논평에 뒤 이어서.
내가 조던 피터슨 영상을 보면서 가장 공감 갔던 부분은 이런 것이다. 물론 내가 조던 피터슨의 (정치적) 한계가 뭔지도 이야기 했는데 그 부분은 지난 글을 읽기를 바란다.
아무튼 그의 강연에서 인상 깊은 것은 이런 것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청년남성들은 여성들과 본질적인 성향 차이가 있다. 뭐나면 여학생의 경우에는 어떤 사회적인 매뉴얼이나 커리큘럼이 주어지면 그것을 우호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남학생들은 보다 더 특별한 동기부여 메커니즘이 없다면 그러한 매뉴얼이나 커리큘럼에 우호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적인 남학생 여학생의 학업 성취도 격차로 나타난다. 공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자리잡힐수록 여학생은 승승장구하지만 남학생은 그렇지 못한다. 이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조던 피터슨은 이러한 성차를 심리적 보상체계의 차이로 설명한다. 뭐냐면은 여자는 남자에 비해 보다 더 자연스럽게 연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능숙하게 찾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적절한 멘토 없이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가족과의 관계에서, 사회 전체와의 관계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 없는 혼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청년남성들에게 제대로 된 삶의 좌표를 찾아주기 위해서는 올바른 권위에 대한 존중, 종교적 심성의 회복, 가족에 대한 헌신 등의 보수주의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상담사이기도 한 그는 삶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 의무, 짐을 이야기할 때 청년남성들이 눈을 반짝였다고 증언한다.
그런 그의 임상적 경험에 비춰 볼 때 무거운 책임, 의무, 헌신 그리고 그것을 충족하는 데서 오는 삶의 의미, 보람, 만족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오직 권리와 쾌락만을 이야기하는 진보주의 리버럴리즘은 현대사회의 심박한 병증인 것이다. 그것이 특히 청년남성을 병들고 방황하도록 만든다.
나는 보수주의 정치로의 회귀와 전통적인 종교적 심성의 회복이라는 그의 시대착오적인 처방과 별개로 지금 현 상황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단만큼은 굉장히 그럴싸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청년 남성들은 진보 자유주의 진영에서 상식으로 통용되는 pc주의와 정체성 정치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디즈니의 행보나 거대 게임회사의 PC주의에 대한 수용양상이 남녀 커뮤니티 사이에서 확연히 달랐다고 느껴진다.
서구적 정체성 정치와 pc주의에 대한 여초 커뮤니티의 수용양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이유의 노래 가사대로) '모르겠으면 외어 Babe'이다. 서구사회에서, 1세계에서 유행하는 담론이라면 일단 그것을 모범답안으로 수용하고 잘 외우는 것이 청년여성들의 경향성이다. 그것이 그들을 교육계나 주류 미디어에서 승승장구하도록 만드는 이점이다.
반면 청년남성들은 그런 '모범답안'을 자기 스스로가 매력적인 무언가로 느끼지 않는다면 '조까라 마이씽'으로 일관한다. 일단 요새 스타워즈의 서사에서 왜 딱히 외모적으로나 업적으로나 매력적이지 않은 동양인 여성과 흑인이 뜬금없이 키스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왜 게임 배틀필드나 오버워치에 역사적 고증이나 초기 작품설정을 붕괴시키면서까지 무리하게 소수자 캐릭터를 넣는지 이해가 안되면 욕부터 박고 보는 게 지금의 청년 남성들이다.
몇번 반복해서 지적했지만 이런 이들의 행태를 일베화의 전조나 혐오주의 확산의 징후로 읽는 것은 너무 게으르고 멍청한 태도이다. 이들은 그저 자신이 내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교조적인 방식의 훈육에 납득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이것은 수천년 동안 남자아이들을 훈육하는 데 곤란을 겪은 모든 평범한 부모와 사회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문제이다. 어떤 사회적 당위를 남자아이들이 당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지금 이 사회가 남자이이들이 어떤 사회적 의제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필요로 하는 그 무언가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에게 있는 것이지 남자아이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민주당과 정의당에는 청년남성들이 겪는 문제들이나 이들의 자연스러운 문화적 습속이나 행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천관율을 비롯한) 천치들이 한 트럭이다.
그런데 조던 피터슨은 이런 골치 아픈 청년 남성 반항아들이 자신의 책임, 역할, 의무를 상기시키는 순간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다고 증언한다. '너가 아무리 쓸모 없어도 적어도 너는 너가 진 짐을 몇 미터라도 옮길 수 있어'라고 말하면 남자아이들이 '정말요'라면서 반색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터슨는 현대의 청년 남성들이 그 누구보다 카리스마적인 어른과 조언자에 목말라 있다고 진단한다.
나는 이 진단에 100% 동감한다.
확실히 청년 남성들은 매뉴얼화된 형태로 주어진 규율 내지는 커리큘럼에 잘 순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납득이 되는 사명감, 미션, 책임감을 심어주는 어떤 계기 혹은 카리스마적 인격이 주어지는 순간 그들은 모든 열정을 불 태운다. 그것이 종교이든, 가족이든, (피터슨이 말하지 않는 선택지이지만) 혁명이든 말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이대남 신드롬에 대처할 대안이 뭐냐고?
그런 의문이 나도 있어서 요새 마주카토라는 여성 경제학자의 논의를 흥미롭게 읽고 있다. 나중에 더 자세한 독서후기를 올릴 예정.
아직까지는 짧은 독서로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의 입장은 '경제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
이 함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이런 것이다. 지금 민주진보 진영이 흔히 착각하듯이 많은 이들이 청년들에게 일자리나 소득과 같은 '경제적 가치'를 약속하면 이 시시한 젠더갈등은 알아서 사그라들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 같은데 이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언젠가 불란서 철학자 들뢰즈가 칸트와 사드(사디즘의 원조 사드가 맞다)를 같이 읽자고 제안한 것처럼 조던 피터슨과 마주카토의 논의를 함께 읽으면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지금 청년 남성들을 진보적 기획에 제대로 끌어들이려면 '너에게 더 많은 소득과 복지혜택을 줄게' '너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줄게' '너에게 못된 말을 하는 놈연들로부터 너를 지켜줄게' 같은 저 전형적인 바보 진보주의자들의 감언이설로 꼬드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진짜로 청년 남성들을 진보적 기획에 끌어들이려면 그들이 목말라 하는 책임, 사명, 의무감, 본분, 역할에 대한 의식 내지는 자각을 끌어내야 한다. 지금 진보담론이 앞으로 좋든 싫은 사회문화 및 경제활동을 미래에 주도할 청년남성들에게 그러한 동기부여를 제대로 하는가? 궁극적인 대의가 여남평등 사회가 됐든, 탄소제로 사회가 됐든, 남북 평화체제 구축이 됐든,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됐든 거기서 청년 남성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호응할만한 미션과 사명이 주어졌는가? 마치 80년대 대학생들의 눈을 반짝이게 한 민주화라는 미션과 소명의식처럼?
청년 남성들의 눈을 반짝이게 할만한, 더 나아가 그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욕망을 되살릴만한 미션, 소명의식을 청년인구 절반에게 되찾아주지 못하는 한 진보는 집권할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의당이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건 기대도 안 한다. 다만 민주당은 일단 박성민과 이철희 같은 늙은 서윗한남 부류의 인간부터 치우고 정상적인 여남 청년인재를 모으는 데서 새출발을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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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페이스북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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